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하일 2세 (문단 편집) ==== 크레타 상실 ==== 비록 3년간 내전을 겪었지만 제국의 북방과 서방은 각각 20년간의 평화와 니키포로스의 평화가 이어져 안정을 유지하였다. 동방의 알 마문도 내전이 황제 쪽으로 기울자 침공을 미루었다. 그런데 남쪽 바다에서 새로운 적이 나타나 동로마를 위협하였다. 바로 아랍인이었는데, 특이하게도 기존의 이집트나 시리아 방면이 아니라 [[안달루스]], 즉 스페인 출신 집단이었다. 그 배경은 이러하다. 816년, [[후우마이야 왕조]]의 수도 [[코르도바(스페인)|코르도바]]에서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에미르 알 하캄에게 진압되었다. 헌데 반란이 워낙 큰 규모다보니 잔당만 1만 5천이 넘었는데, 그들은 배를 타고 지중해를 가로질러 이집트에 도달,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눌러 앉았다. (818년) 하지만 내전을 끝낸 알 마문이 타히르를 보내어 도시를 공격하자 그 중 1만 2천은 다시 지중해를 떠돌다가 아부 하프스[* 그는 크레타에 상륙하자마자 배를 불태우고 --[[배수진]]-- 크레타 정착을 명령하였다. 병사들이 알렉산드리아에 부인과 자녀들을 두고 왔다고 항의하자 크레타 여자들과 새 가정을 꾸리라는 --로마 건국 신화에나 나올만한.-- 명령을 내렸다.]의 지휘하에 내전으로 해군이 약화된 동로마의 크레타 섬을 점령한 것이었다(824년). 이후 알렉산드리아가 타히르에게 함락되자(825년) 안달루스인들은 크레타에 완전히 정착하였다. 미하일 2세는 섬을 수복하기 위한 원정대를 보내었으나 회복에 실패하였다. (826년) 안달루스인들이 29개 도시들을 완전히 정복한 것은 (시칠리아 정복이 시작된) 827년이었으며, 기독교가 허용된 1개의 자치 도시를 제외하고는 종교 탄압을 개시했다. 이후 해적들의 메카로 전락한 크레타를 되찾고자 동로마 측은 수차례 원정대를 보내었으나 [[로마노스 2세]]의 치세인 961년에야 그 뜻을 이루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